가혹한 말 (외 2편)
안은숙
돌을 던진다
돌의 모서리, 그곳은 돌의 입
늘 튀어 나갈 준비가 되어있다
그때 옷은 과녁이 되고
급소를 맞히면 명중하는 고통이 따르게 된다
평생 침묵에 든 입을 연다는 것은
가장 가혹한 말
던지는 방향과 각도
돌을 쥔 분노의 무게에 따라
상처의 깊이가 결정된다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말
나사렛 사내가 땅에 쓴 몇 마디의 글자로
돌의 말은 무효가 되었지만
최초의 순교자였던 남자도
날아드는 돌의 말을
거부하지 못했다
오랜 침묵 속에 있는 돌들을
풀숲에 가보고야 알았다
파랗게 이끼가 돋아나 있었다
설레는 의상
옷걸이에 걸린
상의上衣 하나, 설레고 있다
공중을 아랫도리로 삼고
주머니마다 어지럼증이 가득해
어느 바람에나 잘 흔들린다
단추가 없는 상의는
실이 꿰어진 바람의 눈이고
흔들리는 레이스는
피지 않은 바람의 깃이다
반나절은 하마터면
날려갈 뻔한 외출이었다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
정오는 정수리에
그림자를 이고 있는 시간이죠
밋밋한 그림자에 레이스가 필요해요
햇살을 주워 정오의 치맛단이나
소매 끝에 붙이면, 졸음이 나풀거리고
한 시가 되고 두 시가 되죠
그때 시간은 바닥에 눕거나 발목을 휘감고
비스듬하게 사람들을 따라다녀요
곧 기울어질 정오
이때 나무들도 바람의 레이스를 달고
제 키를 보여주죠
검은 레이스, 마치 우리가 명동 성당에서 본
미망인 프란체스카가 살포시 머리에 얹었던
검은 미사포 같아요
햇살이 돌아서면
눈부신 레이스도 사라지죠
모퉁이를 돌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정오는 지나가는 왼쪽의 방향을 갖고 있어요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당신
저는 당신의 감정을 잘 알지 못해요
딱딱한 그 감정에 오늘은
레이스를 달아주고 싶은 날이에요
—시집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 20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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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숙 / 1965년 서울 출생. 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2015년 《실천문학》에 시 당선. 시집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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