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는 비가 내리고
김상미
밖에는 비가 내리고
우리는 아직도 침대에 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애무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명분
창문을 두드리며 우리를 염탐하는 빗방울들
벗어놓은 옷과 양말들
들끓는 책과 화분들
벽에 걸린 채로도 잘도 익어가는 저 먼 정글의
향기로운 과일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우리는 아직도 침대에 있다
얼마나 놀라운가
두려움 없는 사랑은 부재를 모른다
그래도 잠시, 호흡을 조절하자
한 번도 제자리를 떠난 적 없는 사랑은
우리의 욕망이 아무리 흘러 넘쳐도
모든 걸 다시 제자리로 갖다놓는다
그동안 우리는 몇 번을 더 사랑할 수 있다
외로운 한 존재가 다른 외로운 한 존재를 열망하는
가슴 뭉클한 허기를 한순간도 놓치지 말자
밖에는 비가 내리고
우리는 아직도 침대에 있다
무엇이 두려운가
장미꽃이 활짝 피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20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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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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