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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에게

율리우스에게 ─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만족이 아니라 싫증이다 박판식 세이코 258년 가을, 사람이 직접 낳은 아이가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해 최고 발명품은 텔레스프릿이었다특수전화기로 죽은 사람과 통화하는 장치인데귀신이 먹고 마시고 자는 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성적으로도 여전히고통받는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율리우스라는 천재 로봇이 자살하기 위해어린이에게 공구를 주어 자신을 분해하도록 한 이래로봇의 자살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야단을 맞고 학교에서 나오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마구 녹슬어 버리고 싶다”─ 서울 어린이로봇학교 2학년 5반 학급문고 중에서 괴로움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생각을 버려야 한다괴로움이 일어나기 전처럼 한 생각도 없어야 한다생각하..

바탕색 칠하기 - 조우연

바탕색 칠하기 조우연 상실의 시대에는가로등도 라일락도 그와 그녀의 키스도짙푸른 바탕색에 있었죠 누가 선뜻 노랑을 등지고 있었겠나요 바탕색은 그런 거죠하늘색은 영영 구름의 바탕색이고요가파른 골목을 걸어 올라가는 남자의 바탕에는 회색을 칠해 주죠 교실 아이들이 툭하면 바탕도 칠해야 해요, 묻는 데에는별이 뜨겁게 빛날 일과 차갑게 빛날 일이바탕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는 탓이겠죠 내가 우는 걸 한참 보던 그녀가 던지길바탕색을 고르는 건 너잖니, 그저 밤이 되어 하늘이 검은 거란다그런 그녀도 나의 바탕색인 줄 알았어요 팔순이 다 되도록내 멋대로 색칠을 해 왔네요 늦은 저녁 칙칙한 바탕을 끌고 돌아오던 그가 싫어서그날은 빠삐용처럼 절벽 아래 나를 던져 볼까줄무늬를 입은 나를 삼켜 버릴 듯 출렁거리는 바다가 나..

삶은 나의 일 -심보선

삶은 나의 일심보선​ 나는 대체로 홀로 지내고그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지 못한다​ 산책을 하고 청소를 하고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혼자 생각에 빠져 있을 때표정의 지속과 변화를 의식하지 않는다​ 눈물이 흐르면 눈물이 나오나 보다 한다갱년기나 우울증을 검색하고좋아요,도 가끔 누른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삶이여, 나를 이곳에 두고 먼 곳으로 떠나다오​ 나는 대체로 홀로 침묵 속에서 살아간다침묵은 먼 곳으로 떠난 내가이곳에 머무른 내게 전하는 안부이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삶이여, 나를 이곳에 붙들어라내 등에 하루의 노역을 지우라그리고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나라​ 나는 내가 저지른 죄만 기억한다나는 내가 모르는 타인일 때에만 선한 인간이다 삶이 내 속에서 말한다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우리는 함께 먼..

고드름 2 -이현승

고드름 2 이현승 그런 인생이 있을 거다.만인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지만 늘 떨어질 일과 녹을 일 사이에서애가 타는. 누군가가 올려다보는 그 자리도실은 떨어져 내리면서 만들어진 그런 인생이 있을 거다.떨어질 일만 남은. 봄 입김이 닦아놓은 송곳니 끝은한없이 투명하게 반짝인다. ―계간 《시인시대》 2025 여름호 다시 읽는 짧은 시 깊은 울림----------------------이현승 /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생할이라는 생각』『대답이고 부탁인 말』. 가천대학교 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정중하게 외롭게 (외 2편) -유수연

정중하게 외롭게     유수연   외로움은 혼자 하기도 하고둘이 각자의 외로움으로 슬퍼하기도 한다 설득하려 할수록 비참해진다 바닥까지 내려가보면자신의 바닥을 알게 되면 발돋움해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 바닥을 알고, 내 한계를 알고그곳을 박차고 나왔더니 다른 바닥이 있다 산다는 게 슬픔을 갱신하는 일 같을 때 하필 꽃잎도 다 떨어진 봄날떨어진 건 다시 되돌아가 붙지 않았다 깨진 엄지손톱이 자라지 않았고연약한 건 딱딱한 것에 숨어 있었다 마음이 없는 것처럼 살면 뺏기지 않을 줄 알았어 간을 두고 왔단 토끼의 변명처럼두 눈이 빨갛게 눈물을 흘리면 감싸진 것을, 그것만 낚아채 가져갔다 그물은 물을 버려두고 물고기를 끌어올리지 내 마음도 통과되는 줄 알았는데여과하고 남아버린 게 있구나 계속 놓치지 않으려고, 계..

토마토 파르티잔 -원도이

토마토 파르티잔​    원도이​​ 벽을 쌓읍시다 아니, 벽을 삶읍시다 토마토처럼 벽도 빨갛게 익어갑니다 잘 누르면 으깨지기도 합니다 벽을 말랑말랑하게 가꾸는 일입니다​ 잘 삶은 벽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고 마주 앉아 오물오물 씹는 시간을 다정한 저녁 식사라고 해봅시다 토마토처럼 흐물흐물해진 벽 앞에서 우리는 잠시 입을 맞춥니다​ 입속에서도 토마토는 자랍니다 줄기는 벽을 타고 오를까요 우리는 잠시 채소이거나 과일이거나​ 상관없습니다 벽은 토마토를 알지 못합니다 토마토의 심장에 씨앗이 들어 있다는 걸 씨앗은 아주 작고 보드랍다는 걸 씨앗도 붉다는 걸​ 벽과 토마토의 거리는 유동적입니다 어느 오후 나뭇잎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기분에 따라 흘러 다닙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과 토마토에서 둥글게 ..

Shape of Water -수진

Shape of Water    수진 ​​(비에 젖을 때, 새는 바다를 기억할까?) ​​ 마당에 던져둔 해면海綿이 비를 맞고 있다. 몸이 떨린다. 흥건히 젖은 입을 벌린다. 누군가는 최초의 동물이 해면이라고 했다. 동물계 생물 중 인간과 가장 먼 것 또한 해면이라고.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우리가 같은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구멍을 안에 숨기고 다른 하나는 밖에 내놨다가 들켰을 뿐이야. 마치 인간과 새가 같은 손가락뼈를 가지고 태어나듯 우리는 같은 곳에서 왔다. 뼈로 기원을 깊이 찌르자 구멍이 퉤! 침을 뱉었다. 먹고 싸고 울고 먹고 자는 나는 해면에 더 가까운 동물이다. 온통 물이고 구멍뿐이라 견고하게 무른 것도 비슷하다. 머금고 있는 물렁한 어제가 많아, 살짝만 건드려도 물을 뚝뚝 흘리지. ..

어떤 그림 (외 1편) -이병률

어떤 그림     이병률  미술관의 두 사람은 각자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사람들에게 그림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자신들은 서로를 깊게 바라보다만지고 쓰다듬는 일로 바로 넘어갔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두 사람을 그림 안으로 넣겠다고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아주 오래전부터     ​집을 짓는 데 바람만을 이용했을 것이다​ 거미가 지은 집이나무와 나무 사이가지와 가지 사이허공과 허공 사이​ 충분히 납득은 가지만 멀고도 멀며 가늘고도 아주 길다​ 거미의 권태에 비하면가미가 가진 독의 양은 놀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지내고 ..

캠프 셋째 날―명상 시간

캠프 셋째 날 ―명상 시간    배수연   당신은 이미 눈을 감고 있지만한 번 더 감을 수 있다빵의 흰 살을 홍차에 적시듯 당신은 언젠가 강가에서 둥글고 따뜻한 자갈을 주웠지그 자갈을 눈꺼풀 위에 대었어 눈을 두 번 감았다면 세 번 감을 수 있다어두운 통로가 나타난다그곳은 들판일 수도 사막일 수도 있지만 당신은통로임을 알아차린다멀찍이 문이 있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가 있다면 그 나무는 문이다의자 하나가 있다면 그 의자는 문이다옛 애인이양말 한 짝이옆 방의 호랑말코가 있다면그것은 문이다 당신은 그 문을 천천히 살펴본다본다는 것은 이동한다는 것이다옮겨간다 당신은 방금 전 당신으로부터  문에 닿는다당신은 눈을 감고 있지만지금한 번 더 감을 수 있다     —계간 《포지션》 2024년 가을호----------..

눈의 대장장이 (외 1편)

눈의 대장장이(외 1편)    조혜정  너무도 오래 산 눈의 대장장이가무릎을 녹여 마지막 폭설을 만들었다눈의 대장장이가 금속의 무릎을두드리고 두드리고 두드려서오래된 책들이 아직 나무였던 시절과석탄이 다이아몬드를 낳던 때*를지나왔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이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때의 일이었다무릎이 없어도 눈의 대장장이는 어디에나 잘 도착했다그 도시에서 엥겔지수가 가장 높은여자의 동굴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눈의 대장장이는 아! 이 흰 것 좋아그 여자가 말할 것 같은 순간을 좋아했다동굴에서는 들리는데 모두에게는 들리지 않는희고 차가운 공중의 주파수가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폭설은 내내 그곳에 살았다오래 바라보면 어떤 것들은 영혼을 갖게 된다사람들이 그곳에 문이 있었다는 것을 겨우 기억해 냈을 때여행을 떠나는 거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