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 - 김수영

여만 2012. 10. 29. 09:00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

  김수영




누가 묻는다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
빈 뼈 토막 같은 연근 한 마디를 구해 와 싹을 틔웠더니
바람이 불 때마다 연잎에서도 향기가 난다며

절 한 귀퉁이를 돌 때
살짝 누군가의 옷깃을 스친 것도 같은데
내 발자국 앞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발자국이 있어
그 자리를 따라가는 것 같은데

지나간 발자국에서도 향기가 날까?

붉은 꽃도 지고 푸른 잎도 지고
흐린 물 속에는 탁발을 나가는 검은 발목뼈들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
바람이 불 때마다 살강살강 찰강찰강
물 밖으로 걸어나가는 젖은 발을 보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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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1967년 경남 마산 출생. 경상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남행시초」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시힘’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