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맛을 보다

여만 2012. 9. 11. 09:00

맛을 보다

 

           양애경

 

어릴 적 아버지만 드시던 꿀단지

하얀 자기(磁器) 뚜껑은 끈적끈적

아버지가 찻숟갈로 꿀을 떠먹고

혀를 휘~ 돌려 숟갈을 빨고는

다시 한 숟갈 뜨는 걸 보면

‘더러워라’ 하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중에 혼자 다락에 올라

훔쳐 먹는 꿀맛은

달콤하긴 했지

 

하긴 꿀은 벌들이 빨아먹은

꽃꿀과 꽃가루를 토해낸 거잖아

침투성이이잖아

아니, 침 그 자체이겠네

 

키스는,

상대의 침을 맛보는 일

맛을 보고서

‘아, 괜찮네’ 싶으면

몸을 섞기도 하고

 

몸을 섞는 게 괜찮다 싶으면

아이를 만들기도 하잖아

 

몸과 몸끼리

서로를 맛보는 일

어차피 침투성이

더러울 것 하나 없겠네

 

          —시집 『맛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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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애경 / 1956년 서울 출생.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사랑의 예감』『바닥이 나를 받아주네』『내가 암늑대라면』『맛을 보다』. 현재 공주영상대 교수. '시힘'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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