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을 보다
양애경
어릴 적 아버지만 드시던 꿀단지
하얀 자기(磁器) 뚜껑은 끈적끈적
아버지가 찻숟갈로 꿀을 떠먹고
혀를 휘~ 돌려 숟갈을 빨고는
다시 한 숟갈 뜨는 걸 보면
‘더러워라’ 하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중에 혼자 다락에 올라
훔쳐 먹는 꿀맛은
달콤하긴 했지
하긴 꿀은 벌들이 빨아먹은
꽃꿀과 꽃가루를 토해낸 거잖아
침투성이이잖아
아니, 침 그 자체이겠네
키스는,
상대의 침을 맛보는 일
맛을 보고서
‘아, 괜찮네’ 싶으면
몸을 섞기도 하고
몸을 섞는 게 괜찮다 싶으면
아이를 만들기도 하잖아
몸과 몸끼리
서로를 맛보는 일
어차피 침투성이
더러울 것 하나 없겠네
—시집 『맛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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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애경 / 1956년 서울 출생.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사랑의 예감』『바닥이 나를 받아주네』『내가 암늑대라면』『맛을 보다』. 현재 공주영상대 교수. '시힘'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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