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낮달이 꺼내는 새떼 - 이영옥

여만 2012. 9. 8. 09:00

낮달이 꺼내는 새떼

       ―흰 접시꽃

           이영옥


접시꽃이 엎지른 그림자에 금이 가는 구월
낮달은 가슴을 열고 까만 새떼를 자꾸 꺼낸다
그리움을 보태거나 덜어내며
위태롭게 균형을 잡아오던 접시들은
꽃이 일생 동안 하나씩 공들여 빚어 온 것,
찬바람이 허공에서 하얀 접시 여러 개를 깨트렸다
새떼가 사분거리는 흰 빛을 물고 사라져도
꽃은 이듬해 새 접시를 들여 똑같은 상처를 담아 둘 것이다
꽃 지고 꽃대만 남았다는 건
허술히 담겨 있던 그리움을 슬쩍 쏟아낸 것과 같다
내 슬픔을 떠받쳐준 것을 새들이 물고 간 것과 같다
빈 꽃이 무게를 기억하는 것도
꽃대가 접시돌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도
저들이 잘 낫지 않는 환상통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새떼가 석양을 꾹 찍고 빠른 등기 우편으로 날아갔다
말갛게 씻긴 허공 아래 헛헛하게 서 있는 꽃대들
가진 접시가 없어 아무것도 담아 둘 수가 없다
나는 꽃 필 때부터 깨질 것을 염려했어야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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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옥 / 1960년 경북 경주 출생. 2004년 계간 《시작》 신인상,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사라진 입들』(2007.11 천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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