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이 뚜렷하다
문인수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였던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 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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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198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뿔』『홰치는 산』『동강의 높은 새』『쉬!』.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 얼마 있음 또 마지막 남은 얇은 달력 한 장을 앞에 두고 상념에 잠기겠지요. 거리엔 케롤송이 울리고 세밑이다 세모다 야단법썩일 테고.... 이렇게 우린 세월의 달력을 바삐 넘기면서 마음의 벽지에 얼룩을 묻혀가며 살아가고 살아가는 거겠다 싶어요.
하여 이 시를 골라 봤네요. 가을의 문턱에서 마음 한 자락 깨끗이 비워두고 나이먹음에 대한 생각이나 해봄이 어떨는지요.
(201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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