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토마토 파르티잔 -원도이

여만 2024. 12. 3. 14:47

토마토 파르티잔

    원도이

벽을 쌓읍시다 아니, 벽을 삶읍시다 토마토처럼

벽도 빨갛게 익어갑니다 잘 누르면 으깨지기도 합니다 벽을 말랑말랑하게 가꾸는 일입니다

잘 삶은 벽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고 마주 앉아 오물오물 씹는 시간을 다정한 저녁 식사라고 해봅시다

토마토처럼 흐물흐물해진 벽 앞에서

우리는 잠시 입을 맞춥니다

입속에서도 토마토는 자랍니다

줄기는 벽을 타고 오를까요 우리는 잠시 채소이거나 과일이거나

상관없습니다 벽은 토마토를 알지 못합니다

토마토의 심장에 씨앗이 들어 있다는 걸 씨앗은 아주 작고 보드랍다는 걸

씨앗도 붉다는 걸

벽과 토마토의 거리는 유동적입니다

어느 오후 나뭇잎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기분에 따라 흘러 다닙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과 토마토에서 둥글게 떨어져 내리는 기분은 다를까요

담벼락 아래 토마토 한 주를 심어볼까요

토마토가 자랄 때마다 누군가는 담벼락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토마토를 삶읍시다 아니, 쌓읍시다

토마토 상자에 탄탄한 토마토부터 쌓으며

우리는 잠시 토마토로 쌓은 거리를 이야기했습니다

칼과 당근

 

칼이 자른 수많은 향기로 칼날은 번득인다

당신은 아침마다 당근을 깎아낸다

당근은 오전 9 시처럼 반듯해지고 깎아 낸 여섯 개의 면과 열두 개의 모서리를 가진 나의 후각은 뾰족해지고

빨갛게 흘러 다니는 향기만큼 칼날은 환해질 것이다

 

칼질을 좋아하는 당근은 지구처럼 굴러갈 수 없는데 지구는 점점 더 둥글어지고 싶을까

아직도 지구가 더 둥글어지도록 누군가 깎아내고 있을까

지구의 맨 끝에는 어떤 감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자를수록 깨어나고 씹을수록 가득해지는 향기가 있다

스물여덟 개의 칼을 머금은 당신이

당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자르는 일 곰곰 씹는 일

그리고 자신의 칼을 간직하는 일

당신의 몸속에는 이름 모를 칼들이 가득하다

당신은 칼 하나를 쥐고 아침마다 향기를 궁리한다

칼이 썰었던 수많은 향기로 당신은 이제 주황색이 되는 걸까

당근의 오후처럼 샤프해지는 걸까

온전하게 밝아질 수 있다면

백 년 동안 당근을 깎았다는 어느 무사의 칼에서 향기로운 청동의 녹 냄새를 맡을지도 모른다

딱 잘라서

칼의 측면은 샤프하다

​      ―계간 『시산맥』(2024, 겨울호), 제9회 동주문학상 5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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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이 / 본명 원인숙. 2019년 《시인동네》 등단. 시집 『비로소 내가 괄호 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농촌문학상(2010년), 경북문예현상공모(제2회) 대상, 동주문학상(제9회) 수상.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발표지원)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