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시간 여행 (외 2편)
박남희
내가 너에게 가기까지가 시간이다
너는 감자, 어쩌다 무지개
그러다 바람, 이럴 땐 적당히 꽃이라고 해두자
네가 나를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나를 모른다
그러므로 네가 내게 오기까지가 시간이다
나는 날마다 너를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난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너에게
소크라테스를 사랑하는 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붙여준 이름을 붙여준다
아토포스,
아마도 이것은 너의 이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가는 길을 알지 못하므로,
도처에 길이 너무 많다
아무 길이나 들어서서 너를 찾다가
깜박, 나를 잊는다
시간여행을 하면 할수록
시간의 한가운데가 비어있다는 걸 알았다
그 안에
생각이 없어서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빈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리가 나를 깨웠다
빈 꽃병이 꽃을 유혹하듯
그 빈자리가 너를 꽃피게 했다는 걸 알았다
어름사니*
위험한 노래 위를 걷다 보면 너를 만날까
네 뒤에 숨어 출렁이는 기억을 만날까
너의 그림자를 만날까
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타고 오르는 거미처럼
바람이 두고 온 길을 걷다 보면
뜻밖에도 지워진 기억을 만날까
노을 위를 걷다 보면 나를 만날까
얽히고설킨 노을 밖의 길을 만날까
길이 놓친 달빛을 만날까
달빛이 버린 꽃을 만날까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데
기억의 들판이 자꾸 낯선 길을 새로 만들고
기억이 버린 것들이 무심히 너를 기다리는데
네가 떠나보낸 나를 기다리는데
구름아
바람 위를 걷다 보면 너를 만날까
너와 함께 무심히 흘러온 나를 만날까
출렁이는 밧줄이 붙잡고 있는 바람을 따라
아득한 벼랑 위를 걷다 보면,
⸺⸺⸺
* 어름사니; 남사당에서 줄을 타는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
안녕, 눈사람
겨울의 한복판에
너를 세워두고
그냥 왔다
네 눈물이 글썽이며 자꾸
흘러내릴까 봐
울음이 점점 커져 강물이 될까 봐
어쩌면 네 눈물이 점점 뜨거워져
겨울마저
몽땅 녹여버릴 것 같아서
그냥 왔다
겨울 한복판에
나를 세워두고
—시집 『어쩌다 시간 여행』 20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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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 1956년 경기 고양 출생.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당선. 시집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고장 난 아침』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어쩌다 시간 여행』.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 현재 시전문지 《아토포스》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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