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싸락눈 내리는 저녁 - 이시영

여만 2015. 11. 24. 07:00

싸락눈 내리는 저녁

 

     이시영

 

 

 

 싸락눈 내리는 저녁, 길을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보니 부르는 사람은 없고 그때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있지. 누군가 내 생을 다 살아버렸다는 느낌! 그런데 그 누군가는 누구이며, 과연 나에게 생 같은 것이 있기는 있었을까? 잘 구르지 않는 수레에 시커먼 연탄 같은 것을 싣고 가파른 언덕길을 죽어라 밀고 왔다는 느낌뿐. 그런데 코밑에 연탄가루 잔뜩 묻은 그것을 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싸락눈 그친 저녁, 길을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그때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있지. 누군가 내 생을 다 살고 간 것 같은 느낌! 그런데 그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이며 과연 내가 이 생에 있기는 있었을까? 시간은 때로 뱀처럼 미끄럽게 손아귀를 빠져 달아났고 운명은 늘 제 얼굴을 가린 채 차갑게 나를 스치고 갔을 뿐 한 번도 제 모습을 똑바로 보여준 적이 없지.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이렇게 싸락눈 내리는, 그친 길 위에 문득 나를 멈춰 세워 날카로운 질문만 던질 뿐. 과연 내가 살기는 살았을까? 아니 생을 제대로 살고 있기는 있을까?

 

 

 

    —시집『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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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 1949년 전남 구례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수학.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월간문학』 제3회 신인상 시 당선. 시집 『만월』『바람 속으로』『길은 멀다 친구여』『이슬 맺힌 노래』『무늬』『사이』『조용한 푸른 하늘』『은빛 호각』『바다 호수』『아르갈의 향기』『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