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허수아비 디자이너 - 이현승

여만 2015. 10. 2. 07:00

허수아비 디자이너

  이현승

 

내가 하는 일이란

허수아비 디자이너 같은 일이다.

참새들에게 깜짝 놀랄 아침을 선물하기 위하여

밤의 공책을 메꾸지만 그건 사실 세상 밖의 일이고

무엇보다 참새들에게 허수아비는 비호감이다.

선택에 대한 포기의 비용을 기회비용이라고 하고

그것은 장사꾼에게 이문이 남지 않는 일을 하느니

돈놀이를 하는 편이 낫다는 뜻이지만

철수가 미자 대신 순자를 사랑해서

순자를 선택하고 미자를 포기해서 얻는

이익이란 이익의 관점일 뿐이다.

삶이란 언제나 선택의 편에서 포기를 합리화하는 일이므로

계산 자체에도 막대한 비용이 든다.

미자에게 맞은 딱지는 언제라도 뼈아플 뿐이고

순자가 미자보다 예쁘다는 말처럼 멍청한 말은 없다.

그러므로 허수아비 디자이너의 급여가

얼마인지를 묻는 당신의 신념과는 다르게

나는 어쩐지 오늘 참새들의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참새들은 내게 맡겨라.

참새들이 허수아비를 보고 놀라기는커녕

공들인 옷에 똥칠이나 한다고 비웃지 마라.

허수아비 어깨와 팔에서 쉬도록 하여

참새들을 편안함으로 가두는 것도 넓게 보면 큰 이문이다.

참새야 너무 무서워는 말고 조금 무섭게

너무 친하지는 말고 조금 멀리,

그렇게 같이 살자.

 

      —시집『생활이라는 생각』(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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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2002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생활이라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