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갑오징어 - 이윤학

여만 2012. 10. 20. 09:00

갑오징어 

  이윤학


바닷가 노상 횟집에서
갑옷을 입은 오징어를 시켰다

갑옷을 벗겨내자
대야 가득 먹물이 퍼졌다

갑옷은 두꺼웠고 질겼다
우린 오징어의 갑옷만을
데쳐서 먹는 것이었다

대야의 물을 쏟아내자
하얀 배 네 척이
먹물을 타고 도랑을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갑옷 네 벌을 나눠 먹었다
오징어 네 마리의 닻 없는 영혼을,
노을의 바닷물에 풀어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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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1965년 충남 홍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90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먼지의 집』『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그림자를 마신다』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