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한밤의 퀼트

여만 2012. 7. 14. 09:00

한밤의 퀼트

        김 경인


밤이었는데, 나는 잠을 자고 있었는데, 누가 잠 위에 색실로 땀을 뜨나 보다, 잠이 깨려면 아직 멀었는데, 누군가 커다란 밑그림 위에 바이올렛 꽃잎을 한 땀 한 땀 새기나 보다, 바늘이 꽂히는 곳마다 고여오는 보랏빛 핏내, 밤이었는데, 잠을 자고 있었는데, 여자아이가 꽃을 수놓고 있나 보다, 너는 누구니 물어보기도 전에 꽃부리가 핏줄을 쪽쪽 빨아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보다, 나는 온몸이 따끔거려 그만 일어나고 싶은데, 여자아이가 내 젖꼭지에 꽃잎을 떨구고, 나는 아직 잠에서 깨지도 못했는데, 느닷없이 가슴팍이 좀 환해진 것도 같았는데, 너는 누구니 물어보기도 전에 가슴을 뚫고 나온 꽃대가 몸 여기저기 초록빛 도장을 콱콱 찍나 보다, 잠이 깨려면 아직 멀었는데, 누가 내 몸에서 씨앗을 받아내나 보다, 씨앗 떨어진 자리마다 스미는 초록 비린내, 나는 그만 꽃잎들을 털어내고 싶은데, 이마에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꽃잎을 떨구고 싶은데, 밤이었는데, 나는 아직 잠을 자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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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1972년 서울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문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1년 계간 《문예중앙》에 「영화는 오후 5시와 6시 사이에 상영된다」외 6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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