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못을 박으며 - 박남희

여만 2012. 7. 13. 09:00

못을 박으며 

          박남희



 어쩌면 성수대교와 세계무역센터는 스스로 무너지고 싶어서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고 싶어도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무너지는 것도 행복이다.

그런데 무너지는 모든 것들은 구멍을 통해서 무너진다 구멍 속으로 드나드는 바람과 흐느낌과 역사와 온갖 소문들까지 무너짐에 봉사한다 언젠가 한번은 무너져 본 것이라야 구멍의 공포와 허전함과 무너짐의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은 무너지는 것의 역사다 그렇게도 강성했던 바빌론과 로마의 벽에 나 있던 무수한 화살 구멍들, 그렇게 바빌론과 로마는 무너졌다 그 역사는 지금도 구멍을 통해 이야기되고 세상의 무수한 구명 속으로 퍼져나간다 역사의 총탄은 케네디를 관통하고, 클린턴도 구멍 근처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구멍은 스스로의 몸을 구멍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역사라고, 때로는 천재지변이라고 명명한다 구멍의 이름은 수시로 바뀐다

나는 벽에 못을 박으며 못 끝에서 확장되는 구멍을, 구멍의 역사를 생각한다 아니 사랑을, 절망을, 위선을, 아니 아니, 망치가 내려칠 내 손가락을, 그 아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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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 1956년 경기 고양 출생. 숭실대 국문과,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이불 속의 쥐』,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

 

 

  * 구멍이라는 말,  얼핏생각하면 민망할 수도 있는. 물론 그 사람의 성향과 관련되기는 하겠지만.

 

  구멍의 사전적 의미는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 또는 어려움을 헤처 나가는 길을 비유적으로 쓰이는 말. 

 

  시인은 말한다. 세상은 무너지는 역사요, 모든 무너지는 것들은 구멍으로 비롯되고 그 구멍속에서 사라진다 고. 그것은 구멍이란 이름 말고 다른 이름으로 상황에 맞춰 수시로 진화 확장하면서.  사랑, 폭발, 관계, 이음, 절망......... 

 

  시인의 시각에 무릎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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