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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하게 외롭게 (외 2편) -유수연

정중하게 외롭게     유수연   외로움은 혼자 하기도 하고둘이 각자의 외로움으로 슬퍼하기도 한다 설득하려 할수록 비참해진다 바닥까지 내려가보면자신의 바닥을 알게 되면 발돋움해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 바닥을 알고, 내 한계를 알고그곳을 박차고 나왔더니 다른 바닥이 있다 산다는 게 슬픔을 갱신하는 일 같을 때 하필 꽃잎도 다 떨어진 봄날떨어진 건 다시 되돌아가 붙지 않았다 깨진 엄지손톱이 자라지 않았고연약한 건 딱딱한 것에 숨어 있었다 마음이 없는 것처럼 살면 뺏기지 않을 줄 알았어 간을 두고 왔단 토끼의 변명처럼두 눈이 빨갛게 눈물을 흘리면 감싸진 것을, 그것만 낚아채 가져갔다 그물은 물을 버려두고 물고기를 끌어올리지 내 마음도 통과되는 줄 알았는데여과하고 남아버린 게 있구나 계속 놓치지 않으려고, 계..

토마토 파르티잔 -원도이

토마토 파르티잔​    원도이​​ 벽을 쌓읍시다 아니, 벽을 삶읍시다 토마토처럼 벽도 빨갛게 익어갑니다 잘 누르면 으깨지기도 합니다 벽을 말랑말랑하게 가꾸는 일입니다​ 잘 삶은 벽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고 마주 앉아 오물오물 씹는 시간을 다정한 저녁 식사라고 해봅시다 토마토처럼 흐물흐물해진 벽 앞에서 우리는 잠시 입을 맞춥니다​ 입속에서도 토마토는 자랍니다 줄기는 벽을 타고 오를까요 우리는 잠시 채소이거나 과일이거나​ 상관없습니다 벽은 토마토를 알지 못합니다 토마토의 심장에 씨앗이 들어 있다는 걸 씨앗은 아주 작고 보드랍다는 걸 씨앗도 붉다는 걸​ 벽과 토마토의 거리는 유동적입니다 어느 오후 나뭇잎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기분에 따라 흘러 다닙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과 토마토에서 둥글게 ..

Shape of Water -수진

Shape of Water    수진 ​​(비에 젖을 때, 새는 바다를 기억할까?) ​​ 마당에 던져둔 해면海綿이 비를 맞고 있다. 몸이 떨린다. 흥건히 젖은 입을 벌린다. 누군가는 최초의 동물이 해면이라고 했다. 동물계 생물 중 인간과 가장 먼 것 또한 해면이라고.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우리가 같은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구멍을 안에 숨기고 다른 하나는 밖에 내놨다가 들켰을 뿐이야. 마치 인간과 새가 같은 손가락뼈를 가지고 태어나듯 우리는 같은 곳에서 왔다. 뼈로 기원을 깊이 찌르자 구멍이 퉤! 침을 뱉었다. 먹고 싸고 울고 먹고 자는 나는 해면에 더 가까운 동물이다. 온통 물이고 구멍뿐이라 견고하게 무른 것도 비슷하다. 머금고 있는 물렁한 어제가 많아, 살짝만 건드려도 물을 뚝뚝 흘리지. ..

어떤 그림 (외 1편) -이병률

어떤 그림     이병률  미술관의 두 사람은 각자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사람들에게 그림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자신들은 서로를 깊게 바라보다만지고 쓰다듬는 일로 바로 넘어갔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두 사람을 그림 안으로 넣겠다고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아주 오래전부터     ​집을 짓는 데 바람만을 이용했을 것이다​ 거미가 지은 집이나무와 나무 사이가지와 가지 사이허공과 허공 사이​ 충분히 납득은 가지만 멀고도 멀며 가늘고도 아주 길다​ 거미의 권태에 비하면가미가 가진 독의 양은 놀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지내고 ..

캠프 셋째 날―명상 시간

캠프 셋째 날 ―명상 시간    배수연   당신은 이미 눈을 감고 있지만한 번 더 감을 수 있다빵의 흰 살을 홍차에 적시듯 당신은 언젠가 강가에서 둥글고 따뜻한 자갈을 주웠지그 자갈을 눈꺼풀 위에 대었어 눈을 두 번 감았다면 세 번 감을 수 있다어두운 통로가 나타난다그곳은 들판일 수도 사막일 수도 있지만 당신은통로임을 알아차린다멀찍이 문이 있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가 있다면 그 나무는 문이다의자 하나가 있다면 그 의자는 문이다옛 애인이양말 한 짝이옆 방의 호랑말코가 있다면그것은 문이다 당신은 그 문을 천천히 살펴본다본다는 것은 이동한다는 것이다옮겨간다 당신은 방금 전 당신으로부터  문에 닿는다당신은 눈을 감고 있지만지금한 번 더 감을 수 있다     —계간 《포지션》 2024년 가을호----------..

눈의 대장장이 (외 1편)

눈의 대장장이(외 1편)    조혜정  너무도 오래 산 눈의 대장장이가무릎을 녹여 마지막 폭설을 만들었다눈의 대장장이가 금속의 무릎을두드리고 두드리고 두드려서오래된 책들이 아직 나무였던 시절과석탄이 다이아몬드를 낳던 때*를지나왔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이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때의 일이었다무릎이 없어도 눈의 대장장이는 어디에나 잘 도착했다그 도시에서 엥겔지수가 가장 높은여자의 동굴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눈의 대장장이는 아! 이 흰 것 좋아그 여자가 말할 것 같은 순간을 좋아했다동굴에서는 들리는데 모두에게는 들리지 않는희고 차가운 공중의 주파수가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폭설은 내내 그곳에 살았다오래 바라보면 어떤 것들은 영혼을 갖게 된다사람들이 그곳에 문이 있었다는 것을 겨우 기억해 냈을 때여행을 떠나는 거 어..

토마토

토마토   장서영   언니는 세모가 아니에요네모는 더더욱 아니고요언니는 그저 붉었을 뿐이에요​ 세모와 네모와 어울려도 괜찮았을 빨강​ 토마토를 따고 있어요 시간이 함께 붉어졌어요붉은빛과 흥얼거림이 바구니에 가득 찰 때머리 위를 빙빙 맴도는 솔개에게 말도 걸었어요​ 구름과 연애를 하는 언니가 가끔 보였고요​ 구름 저편에 뭐가 있는 줄 아니?자꾸 구름의 감정이 몰려와가만가만 붉은 토마토를 만질 때뭉클한 언니완숙한 언니​ 도르르 굴러가는 언니의 오후​ 언니는 언제부터 이 세상에 없는 토마토를 길렀을까요언제부터 환부가 생겼을까요까망도 이해하고하양도 사랑했던 언니​ 넝쿨 뒤에 숨은 작은 열매처럼아직도 붉은 구름 속에 숨어 있어요도르르 놓쳐버린 언니의 시간들​ 헝클어진 감정이 모여 이야기가 맺히듯방울방울 토마토 안..

응급실 가는 길

응급실 가는 길   김행숙   올여름은 모든 게 다 체온과 비슷하게 35도, 36도, 37도쯤에 매달려 있어. 삐죽삐죽한 초록, 초록, 초록의 잎들도 38도쯤.상갈파출소 사거리의 신호등도 39도쯤.붉은 신호등처럼 피에 젖은 단 한 사람의 눈동자도 39.5도쯤.축 늘어진 아이를 업고 세상은 응급실에서…… 응급실로 뺑뺑이를 돌고 있어.만져지는 것들이 다 피 같고 피떡 같고…… 제기랄, 나는 내가 더러운 누비옷 같은데 벗겨지지 않아 질질 끌리네.또 한숨도 못 잤어. 잠을 못 잔 사람들이 40도의 잠 속을 걸어 다니는 것 같아. 거리에서너를 사랑했던 이유로 너를 미워하고……여름을 좋아했던 이유로 다 함께 정오의 여름을 증오하며그늘을 찾아서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물끄러미 자기 그림자를 응시하는 순간이 있어.그것은..

파란 돌

파란 돌한 강  십 년 전 꿈에 본파란 돌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아, 죽어서 좋았는데환했는데 솜털처럼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희고 둥근조약돌들 보았지해맑아라,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그때 알았네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그때 처음 아팠네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깊은 밤이었고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놓친 적도 있을까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돌아가 들여다보면아직 거기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시집 『서랍..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외 1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고영민   슈퍼에 가 ‘설레임’ 아이스크림 있냐고묻는다는 것이망설임 있어요, 라고 잘못 말했는데가게 주인이 아무 망설임 없이설레임을 꺼내다준다 영화관에서 단적비연수 두 장 달라는 것을단양적성비 두 장 달라고 말했는데단적비연수 표를 내줬다는,형식과 내용이 합일하는 이런 경이로움을나는 사랑한다 문득, 비 오는 바다가 보고 싶어아침 일찍 오도리 해변에 나갔다가 돌아와밀란 쿤데라가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는 뉴스를 본다시간당 60mm,비가 저렇게 오면 바다도 넘치지 않을까 이름이 ‘나보라’인 신입 직원에게영문 이름을 지어줬다Look at me! 해피 투게더를햇빛 두 개 더, 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후배 시인이 아는 할머니 한 분은헤이즐넛 커피를 해질녘 커피로알고 있다   립싱크—노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