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줄포에서 - 이상국

여만 2011. 8. 26. 07:00

줄포에서

               이상국(1946~ )

 

 

동해에서 조반을 먹고

줄포(茁浦)에 오니 아직 해가 남았다

나라라는 게 고작 이 정도라면

나도 왕이나 한번 해볼 걸

큰 영 하나만 넘어도

안 살아본 세상이 있고

해 질 때 눈물 나는 바다가 있는데

나는 너무 동쪽에서만 살았구나

해마다 패독산(敗毒散) 몇 첩으로 겨울을 넘기며

나 지금 너무 멀리 와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그래도 며칠 더 서쪽으로 가보고 싶은 건

생의 어딘가가 아프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라고

여기가 아니라고 추운 날

기러기 같은 생애를 떠메고 날아온

부안 대숲 마을에서

되잖은 시 몇편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만나는 여자도 없이 살았다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 섰는데

변산반도 겨울 바람이

병신같이 울지 말라고

물 묻은 손으로 뺨을 후려친다

나는 너무 일찍 서쪽으로 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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