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룸 (외 1편)
안희연
맡기러 오는 사람이 있고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다
나는 프런트에 앉아
그들의 마음을 접수하는 일을 한다
다른 계절을 찾아 여행을 떠나려고요
지겹도록 제 자신이라는 사실을 벗고 싶어요
오늘은 맡기려는 사람이 왔다
나는 그에게 열쇠가 든 흰 봉투를 건넨다
문은 잠겨 있지 않지만 잠겨 있다고 믿는다면 열쇠가 필요할 것이다
방 안에는
못 하나
옷걸이 하나
의자 하나
이제 당신은 당신을 벗어 벽에 걸어둘 수 있다
투명해질 수 잇다
물고기가 파도에 지치면 어떻게 되죠
시간에 쪼아먹히는 기분이 들어요
마음의 유속을 따라서
모든 반죽 이전에 손이 있다면 손이여,
나를 처음부터 새로 빚어줄 순 없는 건가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떠내려가 볼 수도 있다
방문 목적에 따라 방의 구조는 재배열된다
색을 먼저 보고자 하는 이에게는 색을
형태를 먼저 보고자 하는 이에게는 형태를 먼저 보여준다
몇 시간이든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지만
방 안의 어떤 물건도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
당신은 들어올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방을 나선다
다만 당신의 손은 어둠의 조도를 맞추는 방법을 배웠고
믿음이 두 눈을 가릴 때에도 묵묵히 그 일을 한다
수진의 기억
나는 파란 대문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 친구처럼 다정하게 드나드는 대문을
그렇게 한 겨울이 흐르고
어느새 봄이 왔다며 화분을 들고 걸어 나오는 사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작은 놀이터를 가지고 있다
그네는 우리를 태우고 바다와 숲을 오간다
아이가 엄마가 되고 노인이 풍선이 되어 날아갈 때까지
그네는 멈춰본 적이 없다 풍선은 아이 손에 들려 되돌아올 때가 많았다
나는 거울과 저울을, 망원경과 현미경을 가지고 있지만
나의 마음은 무엇으로도 측량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토록 많은 골목이 생겨나고 집들이 세워졌을 것이다
미용사의 손이 분주히 잘라내도 또다시 자라나는 머리카락들
발치에 수북이 쌓인 마음을 본다
공터가 눈에 띄게 자라고 있다
울기 위해 숨어드는 고양이에게나
옥상에서 빨래를 걷다 말고 노을에 붙들리는 사람에게나
공평하게 도착하는 편지, 그것이 저녁이라면
나는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벽, 무수한 이름들의 주소지,
이삿짐 트럭이 떠나가고 가로등 불빛이 켜진다
작별은 언제나 짧고 차마 실어가지 못한 사랑이 남아 있어서
누군가 두고 간 사랑을 화분에 옮겨 심는다
파란 대문을 열면 놀랍도록 무성해져 있다
나는 불 꺼진 창을 서성이는 온기, 모든 것을 기억한다
*성남시 수진동.
―계간 《포엠피플》 202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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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 1986년 경기 성남 출생. 2012년 《창작과비평》 등단.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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