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그가 자꾸 걸어온다 -강은교

여만 2013. 8. 2. 07:00

그가 자꾸 걸어온다

 

                 강은교

 

 

 

 

 

  그를 우리는 양파 - 라고 불렀다, 그가 걸어오는 것을 보면 아주 동그랗게 잘 여문 양파 한 개가 굴러오는 것 같았다. 껍질을 벗기면 벗길 수록 자꾸 속이 열리는 양파. 수많은 껍질을 가슴에 갖고 있는 양파,

 

  그가 걸어온다, 껍질 한 개가 걸어온다, 껍질 한 개가 울고 있는 포스터들을 지나, 아까부터 훌적거리고 있는 담벼락을 지나, 주저앉은 계단들을 지나, 그가 껍질 하나를 벗는다, 텅 빈 운동장 같은 입을 벌린다,

 

  그가 키우는 꽃들도 별 뒤쪽으로 숨어버렸다

  양털 구름들도 따라 숨었다

  한 켠에서 킥킥대고 있는 길들

  비틀거리는 집들

  마당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소리

 

  그가 걸어온다, 껍질 한 개가 걸어온다, 껍질 한 개가 권태에 빠진 횡단보도를 지나, 눈을 게슴치레 뜨고 있는 신호등을 지나, 얼굴이 파르스름한 어둠을 지나, 팔을 흔들고 있는 지붕을 지나,,,

 

  그가 자꾸 걸어온다, 껍질 한 개가, 껍질이 된 그의 심장이, 껍질이 된 그의 피톨들이...으흐흐 냉장고 가슴의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