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얼룩 - 이사라

여만 2013. 5. 25. 07:00

 

얼룩

 

      이사라

 

 

 

검버섯 피부의 시간이 당신을 지나간다

 

시간을 다 보낸 얼룩이 지나간다

 

날이 저물고 아픈 별들이 뜨고

내가 울면

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우리가 울다 지치면

한 문명도 얼룩이 되고

 

갓 피어나는 꽃들도 얼룩이 되지

 

지금 나는

당신의 얼룩진 날들이 나에게 무늬를 입히고

달아나는 걸 본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진 문명이 돌연 찾아든 것처럼

내 벽에는 오래된 당신의

벽화가 빛나겠지

 

천년을 휘돈 나비가 찾아들고

 

다시 한바탕 시간들 위로 꽃잎 날리고

비 내리고 사랑하고 울고 이끼 끼고

 

나의 얼룩도

당신처럼 시간을 지나가겠지

 

     —시집『훗날 훗사람』(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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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라 / 1953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히브리인의 마을 앞에서』『미학적 슬픔』『숲속에서 묻는다』『시간이 지나간 시간』『가족박물관』『훗날 훗사람』.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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