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그림
함기석
공원을 그린다
분수대를 그린다
단풍나무 아래 벤치를 그리자
한 여자가 다가와 앉는다
시계를 본다
누구세요?
내가 묻자 새가 난다
여자는 날아가는 새를 바라본다
공원의 어린 꽃과 나무를 둘러본다
한 시간이 지난다
두 시간이 지난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많은 날들이 흘러간다
여자의 눈가에 잔주름이 는다
머리는 희고 허리는 점점 휜다
누굴 기다리세요?
하나 둘 낙엽이 진다
여자의 어깨 위로 차곡차곡 쌓인다
여자는 소리 없이 운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쓰러진다
그때 한 노신사가 공원에 나타난다
하얀 모자를 쓰고
하얀 구두를 신고
여자 곁으로 다가간다
싸늘히 식은 뺨을 만져본다
바람이 분다
우수수 단풍잎들이
여자의 주검 위로 떨어지고
신사는 주머니에서 지우개를 꺼낸다
공원을 거닐며 내가 그린 공원을 지운다
분수대를 지운다
나무를 지운다
벤치를 지우고새를 지우고 여자를 지우고
공원 뒷문으로 말없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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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착란의 돌』『뽈랑공원』, 동화『상상력 학교』. 눈높이아동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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