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 이기철

여만 2013. 1. 19. 07:00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이기철

 

 

나무의 생각이 그늘을 만든다

그늘을 넓히고 좁히는 것은 나무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나무는

나무가 벋고 싶은 곳으로 가서 그늘을 만든다

그늘은 일하다가 쉬는 나무의 자리다

길을 아는가 물으면 대답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만 가서 제 지닌 만큼의 자유를 심으면서

나무는 가지와 잎의 생각을 따라 그늘을 만든다

수피 속으로 난 길은 숨은 길이어서 나무는

나무 혼자만 걸어 다니는 길을 안다

가지가 펴놓은 수평 아래 아이들이 와서 놀면

나무는 잎을 내려 보내 아이들과 함께 논다

가로와 세로로 짜 늘인 넓은 그늘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문학마당》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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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1972년 《현대문학》등단. 시집으로 『청산행』『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유리의 나날』『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나무, 나의 모국어』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