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모과나무 - 안도현

여만 2012. 10. 3. 09:00

모과나무

   안도현(1961~ )

 

 

모과나무가 한사코 서서 비를 맞는다

빗물이 어깨를 적시고 팔뚝을 적시고 아랫도리까지

번들거리며 흘러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

저놈이 도대체 왜 저러나?

갈아입을 팬티도 없는 것이 무얼 믿고 저러나?

나는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모과나무, 그가 가늘디가는 가지 끝으로

푸른 모과 몇 개를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바로 그것, 그 푸른 것만 아니었다면

그도 벌써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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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시간 못 미쳐 한 소나기 했다. 강과 시내, 이슬이며 도랑, 땀이며 바다까지 빨아올린 적란운이 밑동가리 툭 터트려 보도블록이며 도로, 흙길, 지붕, 나뭇잎에 한바탕 난장을 치다 갔다. 우산이 없어서, 어느 빵집에 덧댄 차양 밑에 들어 빗방울의 난장을 바라보며 즐거웠다. 그러나 여기 한사코 그 소나기를 다 맞고 선 모과나무가 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난, 그(/네) 때문에 미어져 올라오는 가슴을 느낀 적이 있는, 바로 그 누군가를 닮았다. 그(/네)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푸른 모과 몇 개를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푸른 것만 아니었다면” 그(/네)도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울지 말자. 당신이 바로 그(/네)의 힘의 뿌리였다. 당신이 당신의 “그 푸른 것”을 위해 지그시 입술을 깨물 듯이.

 

  장철문 (시인·순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