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취우(驟雨)- 윤강로

여만 2011. 10. 10. 09:00

취우(驟雨)

                    윤강로

 

 

외딴 길 가다가 소나기 만났다

멀리서 왔나 보다

비틀대는 빗줄기도 있다

맨발로 거친 돌밭을 건너온 발가락의 상처 실핏줄 내음

하늘은 실핏줄 무늬로 번개쳤다

떼로 몰려 온 빗줄기들이 하얗게 질린 입술로

나를 에워쌌다

나는 낮은 처마 밑에서

원시인처럼 순수하게 두려웠다

 

그럴 때가 많았다

나는 타인들인 빗줄기에 갇혀

눅눅했다

 

그럴 때면 나의 빗줄기 한 가닥이 와서

서로 심금(心琴)의 빗줄기를 튕겼다

머리카락 카락 빗줄기 얼굴 감미롭게 간질이고

눈 밑 잔주름 희미하게 웃던 빗줄기

나의 애니미즘* 빗줄기다

생생하게 귓전에 속삭이는

 

————

* 애니미즘(animism) : 정령설(精靈說)

 

 

                           —《시산맥》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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