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뭇가지에 열린 푸른 기억들
조정인
모과나무에는 꽃이 더디게 왔다.
꽃 피고 열매 맺는 일이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는
먼데 문장들만 같다.
꽃나무 둘레를 느리게 배회하는 발걸음은 하느님의 발걸음을
빌리는 일. 봄날 며칠, 한 줄 문장을 품고 꽃 핀
나무 아래를 서성이고는 했다. 그토록 맑은 세계를
머리에 이고.
그 나뭇가지에 착지한 작은 기별들. 동쪽이 싹 트고
동쪽이 축적되고 동쪽이 자라나
잎사귀 사이사이, 모과 엉덩이가 보였다.
7월 모과는 작고 파란 새들이 날아든 것 같다.
첫 나뭇가지엔 듯, 첫 의혹인 듯 대답인 듯
빛의 광원으로부터 와 있는 둥그런 기억의 진동.
모과는 꽃의 분홍 강보에 싸여, 그 향긋한 어둠에 안겨
눈을 떴을 것인데, 최초, 저의 둥긂을 더듬어 그 나뭇가지에
그런 약속이 있었다는 듯 돌아왔을 것인데
파동으로 가득한 침묵 한 그루.
나무는 빛과 어둠의 협업, 혹은 협연으로 있다.
절반의 빛과 절반의 어둠으로 쓰인 밀서로 거기.
언제부터인가 모과나무는 모과나무라는 그런, 기어이 지켜지는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곧 실종되는 기억으로.
⸺반년간 《서정과 현실》 2020 하반기호
------------
조정인 / 1953년 서울 출생. 199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사과 얼마예요』 『장미의 내용』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
'살맛 나는 방 > 시집 속에서 꺼낸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밀레 -오성인 (0) | 2021.05.08 |
---|---|
위험을 평정하다- 한혜영 (0) | 2020.12.21 |
혼자 울지 마라 - 정용주 (0) | 2020.11.28 |
마그마- 김인숙 (0) | 2020.07.06 |
봄 -이성부 (0) | 2020.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