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심보선

여만 2017. 12. 31. 08:00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심보선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

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

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

 

갈색 가방 속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니, 고작 그게 전부야?”

 

읽다 만 소설책, 쓰다 만 편지,

접다 만 종이학, 싸다 만 선물은 없었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전지전능한 황금열쇠여,

어느 제복의 주머니에 숨어 있건 당장 모습을 나타내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이것 봐. 멀쩡하잖아, 결국 자기 잘못이라니까.”

 

갈가리 찢긴 소년의 졸업장과 계약서가

도시의 온 건물을 화산재처럼 뒤덮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무렴. 직업엔 귀천이 없지, 없고말고.”

 

소년이여, 비좁고 차가운 암흑에서 얼른 빠져나오렴.

너의 손은 문이 닫히기 전에도 홀로 적막했으니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난 그를 향해 최대한 손을 뻗었다고.”

 

허튼 약속이 빼앗아 달아났던

너의 미래를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아, 여기엔 이제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는 소년은 없다네.”

 

자, 스크린도어를 뒤로하고 어서 달려가렴.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에게로 쌩쌩 달려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우리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

 


    * 이 시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을

     2016년 5월28일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중 사망한 열아홉 살

    소년을 생각하며 고쳐 쓴 것이다.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2017. 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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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컬럼비아대학교 사회학 박사.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눈앞에 없는 사람』『오늘은 잘 모르겠어』, 산문집으로 『그을린 예술』이 있다. ‘21세기 전망’ 동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