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절망에게 -문태준

여만 2016. 12. 22. 20:59

절망에게

 

   문태준

 

 

 

당신은 허리춤에 요란한 바람과 자욱한 안개를 넣어두었네

내부는 깊은 계곡처럼 매우 신비롭네

외출을 앞둔 당신은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을 거울 앞에서 큰 빗으로 오래 빗어 내리네, 장마처럼 저음으로 중얼거리면서

당신은 여름밤의 무수한 별들을 흩어 버리네

촛불을 마지막까지 불태워 버리네

밤마다 우리를 눈 감을 수 없게 하네

당신은 연륜 있는 의사들을 좌절시키네

지혜의 눈에 검은 안대를 씌우네

그러나 아이들의 꿈인 사과를 떨어뜨리지는 못하리

 

당신의 고백을 나는 기다리네

허공이 쏟아지기를 기다리는 절벽처럼

꽃을 기다리는 화병처럼

 

   —《시인수첩》2016년 가을호

-------------

문태준 /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먼 곳』『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