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로 그린 그림
박진성
우리는 이 방으로 식물들을 가져왔다 벽지가 있고 책장이 있고 허기가 있는 방으로 우리는 식물들을 가져왔다 그게 얼굴이 될 줄은 몰랐지 그게 이 방의 표정이 될 줄은 몰랐지
눈의 자리엔 나뭇잎만 얹어놓고 단 한 장의 나뭇잎만 떨어뜨려 놓고
우리는 입과 귀를 찾으러 봄의 끝까지 가봤다
귀를 찾는 일은 귀로 기도를 해보는 일, 우리는 서로의 귀를 만져보았다 꽃이 지고 있었다 이제 막 진 꽃을 귀에 걸고 돌아오던 저녁이 있었다
꽃으로 입을 짓는 일은 꽃의 소리로 기도를 해보는 일, 우리가 우리의 방으로 우리를 버리고 돌아오던 저녁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창문을 열어두었지
그리고 정오에 가끔씩 밤이 강가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정에 가끔씩 나비가 이 방으로 취하러 오는 것을 보았다
나비가 코의 자리에 앉아 얼굴을 완성하는 걸 어둠 속에서만 보았다 서로의 얼굴이 궁금할 때마다 그 방을 열어보곤 했다
식물로 그린 그림, 식물의 마음으로 갈아입고 우리는 자주 계절 밖으로 떠났다가 돌아왔다
———
* 밀란 쿤데라 : 정오에 가끔씩 밤이 강가로 가는 것을 보았다.
—《현대시》2015년 7월호
-------------
박진성 / 1978년 충남 연기 출생. 2001년《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목숨』『아라리』『식물의 밤』, 산문집『청춘착란』.
'살맛 나는 방 > 시집 속에서 꺼낸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 빈 것들 -공광규 (0) | 2015.09.18 |
---|---|
화살 나무 - 박남준 (0) | 2015.08.26 |
우리 그냥 -고 영 (0) | 2015.08.21 |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박제영 (0) | 2015.07.10 |
두꺼비 - 박성우 (0) | 2015.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