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풍경이 되고 싶다 -심재휘

여만 2014. 7. 22. 06:00

풍경이 되고 싶다

 

      심재휘
 

  언젠가 이 집을 떠날 때 한 가지만 가지고 가라 하면 나는 북쪽 창밖의 풍경을
데리고 가겠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그 은행나무 숲에 나는 평생 한 번도 찾아
가지를 못하였지. 더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워지지도 않는 숲의 셀 수 없는 표정.
내가 볼 때만 내 안에서 풍경이 되는 풍경. 살다 보면 이 집의 문도 밖에서 영영
잠글 때가 오겠지. 그러면 창밖 풍경을 데리고 다니다가, 애인인 듯 사귀다가,
나란히 앉아 더 좋은 풍경을 함께 보다가, 그와도 이별을 예감할 때가 오겠지.
그때가 오면 슬쩍 고백해보는 거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너의 뒤가 보고 싶어.
그곳으로 가서 너의 창밖에 사는 한 마리 무심한 풍경이 되고 싶다고 부탁해보
는 거야. 누군가의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풍경으로 살아간다는 거, 비바람에 함
부로 흔들릴 수 있는 표정이 된다는 거, 그러니까 나는 너무 오랫동안 풍경을 보
기만 하며 살았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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