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촛불 -송찬호

여만 2011. 1. 13. 13:10

촛불

    -송찬호(1959~ )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

나는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

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쥔 손 안에 촛불이 켜졌다

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 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

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

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

----------------------------

'살맛 나는 방 > 시집 속에서 꺼낸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 - 강우식  (0) 2011.01.15
삼월원사(三月願寺) - 고은  (0) 2011.01.14
조춘(早春) -신달자  (0) 2011.01.12
다비 - 김재진  (0) 2011.01.06
꽃피는 애인들을 위한 노래 - 정현종  (0) 2011.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