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눈 - 김기택

여만 2014. 2. 21. 07:00

 

      김기택

 

 

 

바람을 타고 흰 발바닥들이 뛰어다닌다.

고양이에서 몸과 다리를 뺀 가벼움이 날아다닌다.

고양이에서 털과 이빨과 발톱을 뺀 탄력이 날아다닌다.

고양이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고양이 몸을 떠난 후에도 없어지지 않는 가벼움이

허공에다 제 몸을 마구 휘갈긴다.

얼마 전까지 고양이였다가 이제 막 고양이를 벗어던지고는

새로 입은 가벼움을 못 참겠다는 듯

반쯤 기화된 발로 허공에 발길질한다.

제 가벼움과 몸 없음과 투명함이 근질근질하다는 듯

추위 돋친 발톱으로 허공을 할퀸다.

고양이에서 다 벗어났는데도

아직 고양이를 버리지 못해 제 꼬리를 쫓아 빙글빙글 돈다.

공기조차 답답하고 가벼움조차 무거워

떨어지다 말고 어리둥절 머뭇머뭇 갸웃갸웃 서성거린다.

헤매다 돌다 마지못해

떨어진다.

 

 

사뿐,

땅에 닿자마자 발바닥들 녹는다.

녹아 동그랗게 스며드는 발자국들 찍힌다.

조금씩 지워져가는 땅바닥은 느닷없이 가벼워져서

어쩔 줄 모르다 사라지고

(땅바닥 밑에 눈 내리는 또 다른 허공이 있을 것만 같다)

고양이 흰 발바닥들만 남는다. 쌓인다.

거대한 한 마리 고양이의 흰 잔등 같은 들판 위로

몸무게가 누르는 발자국들이 찍힌다.

 

        —《현대시》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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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곱추」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소』『껌』『갈라진다 갈라진다』 등.

 

 

 

* 지금 영동과 영남지방 쪽에는 눈이 문제다. 눈도 폭설이 문제다.
금강산 이산상봉 행사장에도 눈이 문제란 소식이다.
피붙이들과 생이별해 이젠 팔 구십이 넘은 고령인 그들,
상봉현장의 뉴스를 접하니 남남지간인 나도 괜히 눈시울이 뜨겁다.
제발 눈이 그들의 만남에 훼방을 놓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번 폭설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꺾인 꽃다운 청춘들의 비통한 소식이 또 
우리를 슬프게 한다. 리조트 붕괴사고가 그것이다.  
꺾인 청춘도 청춘이지만 찢기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할
그들의 부모와 가족의 참혹한 고통은 어찌 가늠이나 될까.

그들에게 온유한 신의 치유가 있길 빈다.

 

아뭏든 폭설, 세상사 그 폭,이 문제다.

폭우, 폭염, 폭풍, 폭식, 폭도, 폭정, 폭침, 폭락, 폭도, 폭주, 폭리........
그러나

 

눈과 얼음이 관련된 소치 동계올림픽현장은 우리 국민들 뿐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하게 한다. 오늘 자정을 넘기면 자랑스런 대한의 딸, 아으 그녀.

피겨 여제 김연아 선수가 빙판 위에 그녀의 마지막 명시를 쓸 것을 믿는다. 
그리고

 

이 시처럼 생각해 보면 춘삼월에 사뿐 내리는 눈은 얼마나 간지러운가?
가벼움조차 무거운 그런......

(201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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