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신현락
인류 최초의 문자는 매듭이었다
금기와 결속의 끈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
낳은 결승문자
금줄에 엮어진 붉은 고추와 푸른 솔
울음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어둠을 헤치고 생가의 대문에 내건
최초의 문자를 온전히 나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내 이름이 조상에 의해 태어났듯이
지금 내가 쓰는 문자의 팔 할은
그곳으로부터 흘러온 것이다
당신에게 보내는 나의 문자에
완강한 금기의 영역표시가 배어 있는 건 내 탓이 아니다
내가 나에게 걸려 넘어져도 당신이 같이 넘어지고
당신이 당신에게 걸려 넘어져도 내가 같이 넘어지는 것이어서
이건 옳지 않다고 침묵을 택한다 해도
침묵은 또한 말의 결승문자인 것
당신의 침묵에 걸려 넘어진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를 넘어설 최후의 문자는 무엇일까
울음? 침묵?
배냇저고리에 봉인된 젖냄새 배인 별자리 혹은
사랑이나 죽음 따위는 더욱이 아님을 나는 안다
다만 세상에 아직 아무런 매듭이 없는 문자가 있다면
내용을 갖지 않은 바람의 운율이거나
비가 내려도 젖지 않는 허공 근처일 거라는 느낌 혹은
시작도 끝도 없는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이 아닐까
그 빈곳으로 가서 태어나는 최초의 문자가
비로소 당신의 매듭이다
—시집『히말라야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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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락 / 1960년 경기 화성 출생.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따뜻한 물방울』『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히말라야 독수리』, 논저 『한국 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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