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나무 술잔- 공광규

여만 2013. 6. 18. 07:00

 

나무술잔

 

 

   공광규

 

 

 

 

 

토요일 격주로 나가는 정신장애인 시 치유 교실에서

칠판에 그린 나무를

수강생이 칵테일 잔으로 발상해 내었다

약물로 기억을 죽이고 있다는 처녀인데 참 잘했다

 

 

봄날 청춘이 마시던 핑크 레이디

여름날 파란 바닷가에서 벌였던 섹스 온 더 비치거나 에메랄드 마티니

가을날 나무 아래서 벌였던 키스 오브 파이어

겨울날 빈 잔이어서 투명한 크리스털 글라스

 

 

주택가 봄 언덕을 내려오는데

살구꽃이거나 복사꽃 핑크 레이디 칵테일 잔을 들고 있는 주택들

아직 술을 못 배운 미성년자가 많이 사는 동네여서

목련꽃 아이스크림을 더 많이 들고 있는 주택들

 

 

지난가을에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잘 익어가는 포도주 같은 누나가 살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누나가

레드 와인 잔을 들고 있던 주택들

 

      —《현대시학》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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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와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학 일기』『마른 잎 다시 살아나』『지독한 불륜』『소주병』『말똥 한 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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