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바위
이은봉
바위는 제 몸에 낡고 오래된 책을 숨기고 있다
바위 위에 앉아 그냥 벅찬 숨이나 고르다 보면 책의 흐릿한 글자들 보이지 않는다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여기저기 갈피도 찢겨져 나가 자칫하면 책이 숨겨져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지금은 일실된 옛 글자로 씌어진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자꾸만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홍당무처럼 낯을 붉히는 참식나무들의 마른 잎사귀들이나 귓가에 다가와 글자들의 뜻을 겨우 속삭여주기 때문이다
더러는 멧새들이 날아와 글자들을 짚어가며 재잘재잘 뜻을 설명해줄 때도 있다
제 몸에 숨기고 있는 이 낡고 오래된 책의 내용들이 대견스러워서일까 바위는 가끔씩 엉덩일 들썩여 가며 독해를 재촉하기도 한다
내 둔한 머리로는 뽀얗게 형상을 그려가며 읽어도 간신히 몇 마디 뜻 정도나 깨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앞단추를 따고서는 거듭 제 젖가슴 열어 보이는 바위의 엉덩이 위에 철썩, 손바닥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문득 정신을 차리는 바위는 때로, 너무 서두르지는 마세요 벌써 겨울이 오고 있지만요, 은근히 다짐을 주기도 한다
바위는 명년 가을이 와도 내가 제 몸에 숨기고 있는 책을 다 읽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나는 끈질기게 그녀가 치맛자락 속에 숨기고 있는 이 낡고 오래된 책을 계속해서 읽어나갈 작정이다
옛 글자들을 읽고 일실된 진실을 복원하는 일을 나 말고 누가 또 할 것인가
애써 궁리하다 보면 언젠가는 바위의 숨소리만 듣고도 그녀가 제 속살에 숨기고 있는 책의 내용을 다 알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으리라.
--------------------
이은봉 / 1953년 충남 공주 출생. 숭실대 문학박사. 1983년 《삶의 문학》에 평론 등단. 1984년 《창작과비평》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좋은 세상』『봄 여름 가을 겨울』『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무엇이 너를 키우니』『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길은 당나귀를 타고』『책바위』. 평론집 『실사구시의 시학』외. 한성기문학상, 유심작품상 수상. 계간 《불교문예》주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살맛 나는 방 > 시집 속에서 꺼낸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에 대하여 - 복효근 (0) | 2012.06.04 |
---|---|
좋을 대로 해라 - 김규동 (0) | 2012.06.03 |
몸살 -강연호 (0) | 2012.05.30 |
똥개 - 이현승 (0) | 2012.05.28 |
나비의 관정(管井) 공사기술에 대한 보고서 - 안도현 (0) | 2012.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