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구절초 꽃밭에 들다 -이운진

여만 2011. 12. 20. 10:00

구절초 꽃밭에 들다

                  이운진

 

 

구절초 꽃밭에 닿아 꽃잎에 바싹 몸을 붙이면

잠시 꽃잎을 입었다 벗은 듯

나이 들고 야윈 몸에도

나비가 맥을 짚고 날아간다

 

저기 환한 꽃밭 속으로,

 

나비가 앉았던 소녀여

꽃을 따던 청년이여

꽃밭의 울타리를 넘지 말고 오늘 밤 사랑을 하여라

쏟아지는 흰 꽃불을 끄고 입을 맞추어라

아무래도 꽃밭은 비밀의 장소

참았던 젖은 고백도 좋아라

 

저기 꽃의 밀물을 넘는,

 

나비처럼 허공에 등을 대고

아홉 날의 밤을 보낸 뒤에라도

다음 생의 사랑을 만난다면

꽃잎에 몸을 붙인

나의 죄는 아름답겠다

아름답겠다

 

       —《우리詩》200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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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진 / 경남 거창 출생. 동덕여대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1995년 ≪시문학≫으로 등단. 빈터 동인. 시집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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