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꽃 1 - 문효치

여만 2011. 11. 8. 11:00

꽃 1

                  문효치

 

 그대는 온다.

어느 평범한 오후의 한적(閑寂)을 골라

 

 

아스라한 향기를 몰고

진붉은 빛깔을 거느리고

지하로부터, 하늘로부터 그대는 온다.

 

 

뇌수(腦髓)에서 자아내는

더운 눈물을 만나기 위해 온다.

 

 

와서 살을 헤집고

내 머리통 속에 뚫린

까아만 허공에 들어가

잠시 한 초롱 불을 켜고

신접(新接)의 이삿짐도 들이고

뚝딱거리며 집도 짓다가

 

 

그대여, 갑자기

불을 끄고

집도 헐고

 

 

다시 향기와 빛깔을 거두어

가버리는 그대여.

 

      —활판 시선집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바다의 문 6

  

 

내소사 대숲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오늘은 한 가마니 지고 와야겠다.

 

저리도 쓸쓸하게 돌아앉아

울음 훌쩍거리고 있는 저 놈

무인도를 위해.

 

썰물 따라 물소리 멀리 가고

남는 것은

갯벌에 부우옇게 번져가는 외로움.

 

어서

내소사 대숲

찬 기운에 영근 푸른 달빛을

한 동이 이고 와야겠다.

 

내가 바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어리석은 사랑, 처음부터 아예 되지도 않을 일.

 

앓는 가슴이나

되풀이 되풀이 쓰다듬으며

저 놈 무인도 옆에

지켜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활판 시선집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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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치 / 1943년 전북 군산 출생. 1966년 〈한국일보〉〈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 『무령왕의 나무새』『남내리 엽서』『계백의 칼』『왕인의 수염』등 10여 권. 활판 시선집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현재 계간 《미네르바》의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