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1
문효치
그대는 온다.
어느 평범한 오후의 한적(閑寂)을 골라
아스라한 향기를 몰고
진붉은 빛깔을 거느리고
지하로부터, 하늘로부터 그대는 온다.
뇌수(腦髓)에서 자아내는
더운 눈물을 만나기 위해 온다.
와서 살을 헤집고
내 머리통 속에 뚫린
까아만 허공에 들어가
잠시 한 초롱 불을 켜고
신접(新接)의 이삿짐도 들이고
뚝딱거리며 집도 짓다가
그대여, 갑자기
불을 끄고
집도 헐고
다시 향기와 빛깔을 거두어
가버리는 그대여.
—활판 시선집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바다의 문 6
내소사 대숲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오늘은 한 가마니 지고 와야겠다.
저리도 쓸쓸하게 돌아앉아
울음 훌쩍거리고 있는 저 놈
무인도를 위해.
썰물 따라 물소리 멀리 가고
남는 것은
갯벌에 부우옇게 번져가는 외로움.
어서
내소사 대숲
찬 기운에 영근 푸른 달빛을
한 동이 이고 와야겠다.
내가 바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어리석은 사랑, 처음부터 아예 되지도 않을 일.
앓는 가슴이나
되풀이 되풀이 쓰다듬으며
저 놈 무인도 옆에
지켜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활판 시선집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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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치 / 1943년 전북 군산 출생. 1966년 〈한국일보〉〈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 『무령왕의 나무새』『남내리 엽서』『계백의 칼』『왕인의 수염』등 10여 권. 활판 시선집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현재 계간 《미네르바》의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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