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장롱
이경림
아버지, 살구씨 하나를 뜰에 심었는데 왜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장의 떡잎이 나오나요
그 속에 무슨 손이 녹두 같은 싹 터트려
허공으로, 허공으로 치솟게 하나요
햇살 속으로 이슬 속으로 소나기 속으로 막 달아나게 하나요
문득 비 그친 후 노란 김 피워 올리며 아기 살구 몇 매달게 하나요
떡잎에서 살구까지 몇 리나 되는지 나는 몰라요
막 달아남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몰라요
거기 가면 온전한 살구나무인 살구나무가 있을 것도 같아
막 달아나는 저 살구나무의 속도를 흉내도 내보지만
끝내 그건 살구나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살구나무 장롱 속의 일
폭양이 황금빛 살구들을 떼로 몰고 오는 저녁이예요 아버지
장지문을 열면
신내를 확 풍기며 달려드는 미친 년 같은 살구나무 한 그루가
꼭 살구나무만한 그림자에 싸여 흔들리는데요
자꾸 왜냐고 물으면
그 또한 꼭 살구 한 알만한 장롱(欌籠) 속의 일이 아니겠느냐고……
—《현대시》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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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림 / 1947년 경북 문경 출생. 1989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토씨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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