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무릎이 없는 한철- 최형심

여만 2011. 9. 15. 23:37

 

무릎이 없는 한철

                                         최형심

  

   그리움도 한철, 나의 저녁을 거니는 바람이 더는 미풍이 아니다. 너 없는 하루는 천년처럼 침묵하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또 한 해가 졌다. 발아래 가을은 넘쳐도 내내 여물지 못해 거리에서 한철 바람에 기댈 뿐, 상처 없는 꽃은 없다. 소음과 고요 사이 은단풍나무가 소진한 열병이 붉다. 벽을 기는 잎들은 모가지를 떨군다.

 

   옛집 문고리를 놓고 가는 바람의 손목을 붙잡고, 안쪽의 울음을 당겨 홀로 단단해지고 싶었다. 낯선 말들이 발등을 스쳐가고 숨바꼭질에 지친 여우별이 잠든 그곳, 나는 어떤 절기節氣로 다가가 당신을 움트게 했나. 날것의 그늘로 보랏빛 저녁이 달려든다. 뒤란을 돌아 나오는 그을음 묻은 저녁바람은 그렇게 나를 불러 세웠다.

 

   혼자 가늠하는 두 저녁 사이의 뼈. 나는 무릎으로 우기雨期에 이르러, 당신의 맨발을 기억했다. 당신의 눈동자는 붉다, 아니 따뜻하다. 누구의 이마를 빌어 겨울눈을 새길까, 다시 깨어나야 하는 잠이 쓰다. 이 모든 통증을 쓰다듬으며 나는 또 저물어 간다.

  

                           —《현대시》201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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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 1971년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 수료. 2008년 《현대시》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