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하게 외롭게 (외 2편) -유수연
정중하게 외롭게
유수연
외로움은 혼자 하기도 하고
둘이 각자의 외로움으로 슬퍼하기도 한다
설득하려 할수록 비참해진다
바닥까지 내려가보면
자신의 바닥을 알게 되면
발돋움해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
바닥을 알고, 내 한계를 알고
그곳을 박차고 나왔더니 다른 바닥이 있다
산다는 게 슬픔을 갱신하는 일 같을 때
하필 꽃잎도 다 떨어진 봄날
떨어진 건 다시 되돌아가 붙지 않았다
깨진 엄지손톱이 자라지 않았고
연약한 건 딱딱한 것에 숨어 있었다
마음이 없는 것처럼 살면 뺏기지 않을 줄 알았어
간을 두고 왔단 토끼의 변명처럼
두 눈이 빨갛게 눈물을 흘리면
감싸진 것을, 그것만 낚아채 가져갔다
그물은 물을 버려두고 물고기를 끌어올리지
내 마음도 통과되는 줄 알았는데
여과하고 남아버린 게 있구나
계속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놓지 않으려다
내 사랑은 죄다 아가미가 찢겨 있구나
형 물이잖아
사주를 봐준다는 말이 좋다 내 미래를 예비해주는 것 같다 내 미래를 걱정해주는 말씨도 좋다
태어난 날 미래가 정해진다는 건 미신 같지만 설명이 가능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이해를 진심이라고 부른다
나는 금이니 자기랑 잘 맞을 거라던 너는 이제 없지만
네가 내 생일을 알아내기 위해 사주를 봐주겠다고 한 걸 나중에 알았을 때 내가 태어난 게 처음으로 좋았다
우리의 허무는 능금
버리긴 아까워 예쁘다 보는 게 있다
동산에 능금이 가득하다
능금은 옛 한국 사과다
이것을 알게 된 이유가 내겐 여름처럼 소중하다
상한 걸 도려내 건네던 때가
사람마다 한철씩 있다
내가 도려낼 상처인 걸 모를 뿐
그때 뭐라 뭐라 말하고
너는 하기 힘들다 했다
살아가는 게?
사랑하는 게?
답은 같아도 재차 물을 수밖에 없다
그건 알아도 도리 없는 일이다
그게 시큼한 맛이라도
바람은 계속 능금을 키운다
맛없는 걸 알아도
일단 한입 베어 물고 뱉었다
사랑도 삶도 맛만 보며 살 순 없을까
―시집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2024.11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
한강이 없다
순식간에 끝나는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놓친 손을 빠르게 다시 잡을 때
온기가 밝아진다
영혼은 빈 유리컵에 뱉은 담배연기
알 수 없어 뒤집어놓곤 한다
바뀐 신호를 따라
인파가 나를 밀어낸다
놓칠세라 어깨를 잡는 얼굴을 바라보며
생경하다 믿어버린
녹슨 생각은 접어두고 펼치지 않았다
여기는 여기에
한가득 나를 채워두고 갈게요
올이 풀린 연기가 되어
커터칼을 뺐다가 넣다가
여전히 그을 수 없는 몸 어딘가처럼
편지도 구석부터 어두워졌다
저기는 저기에
없다
아직도 막차가 다닌다 아직은 보고싶지 않다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시집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 2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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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연 / 1994년 춘천 출생. 명지대 3학년 휴학 중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애인」 당선. 시집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