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어떤 그림 (외 1편) -이병률

여만 2024. 11. 28. 05:06

어떤 그림 

 

   이병률

 

 

미술관의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사람들에게 그림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자신들은 서로를 깊게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로 바로 넘어갔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두 사람을 그림 안으로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아주 오래전부터

 

    

집을 짓는 데 바람만을 이용했을 것이다​

 

거미가 지은 집이

나무와 나무 사이

가지와 가지 사이

허공과 허공 사이​

 

충분히 납득은 가지만 멀고도 멀며 가늘고도 아주 길다​

 

거미의 권태에 비하면

가미가 가진 독의 양은 놀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몸뚱이의 앞과 뒤를 관통하던 빛 덕분에

몸 안쪽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던 거미가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면서도 미안하지 않게

거미줄에다 덜렁 나를 걸쳐놓고 돌아온 것인데

나는 그네를 타고 있을까

잘 마르고 있을까​

 

거미줄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지탱할 것인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물과 건물 사이를

허공과 허공 사이를​

 

안간힘으로 붙들고 있는 거미줄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2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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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