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밥이나 먹자, 꽃아 - 권현형  

여만 2011. 4. 19. 15:11

밥이나 먹자, 꽃아  -  권현형(1966~ )


나무가 몸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온다

봄 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의 부음을 만개한 꽃 속에서 듣는다

오래 전 자본론을 함께 뒤적거리던

모임의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촘촘히 매달려 있는 꽃술들이 갑자기

물기 없는 밥알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입안이 깔깔하다

한 번도 밥을 먹은 적 없이

혼자 정신을 앓던 사람아 꽃아

모를 일이다 누가 아픈지

어느 나무가 뿌리를 앓고 있는지

꽃아, 일 없이 밥이나 먹자

밥이나 한 끼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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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고 붉은 꽃떨기’가 쏟아지는 계절이다. 첫 연 꽃 피어나는 모습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허공을 찢으며’라고 격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긴 한설과 결빙의 혹한 지나왔기로서니 뭐, 순환하는 자연현상을 이렇게까지나 과하게? 그럴 만한 연유 있었다. 젊음의 순결했던 한때를 함께한 적 있었던 그의 부음이 날아왔기 때문. 사람의 말이든 시의 말이든 뒤까지 들어봐야 할 일. 만개한 봄꽃 속에서 아는 누구의 부음을 들어보라. 욕지기 같은 게 뭉클 쏟아질지도.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아름다운 회한의 구절 그렇게 태어나고, ‘혼자 큰 키(순수한 정신)를 앓던 사람아 꽃아’ 탄식 솟고. 일찍 간 너도 아팠겠지만, 오늘 나도 뿌리까지 아파 딴청을 한다. ‘일없다, 꽃아, 밥이나 먹자’고. <이진명·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