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詩 /각시붓꽃

붉은 아카시아꽃의 편지

여만 2021. 3. 5. 11:00

붉은 아카시아꽃의 편지

 

  

 

 아카시아꽃 필 때면 어김없이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비명을 황급히 뒤쫓는 검은 군화 소리 들려온다

 

 그날 이후 영영 기별이 끊긴 정일독서실 방 친구, 선생 님이 꿈인 뿔테안경의 스무 살 아이, 양영학원 대입 종합 반 삼수생, 장래 의사가 되어 소아마비 누이 다리를 고쳐 주겠다던 내 옆자리 친구

 

 너를 떠올리다 눈을 감으면 함성 가득한 금남로를 지 나 산수오거리 비좁은 골목길을 지나 우거진 지리산 산 허리까지 기어올라 울부짖는 아카시아꽃!

 

 내 몸속으로 들어와 요동치는 오월은 짙푸른 멍이다 내 두 눈을 물들이는 오월의 노을은 그래서 핏빛이다

 

 닥치는 대로 쓰러뜨릴 듯 어디선가 불쑥 나타났다 사 라지는 바람, 그날 그 낯선 바람은 떼 지어 어디로 몰려

갔을까

 

 푸른 제복을 빌려 입고 K고 앞 대로변에 부동자세 로 줄지어 선 가로수들, 바람이 할퀴고 간 쪽으로 가로수 아래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성명 미상의 이름들

 

 눈 감아도 귀 닫아도 그 모진 오월이 다시 또 내 몸을 휘젓는다

 

 인적 끊긴 골목길을 맨발로 숨죽이며 지날 때 저 멀리 전라선 철로 위로

 그날의 철잠자리 또 날고 단박에 한낮의 정적을 깨뜨 리는 기관단총 소리

 

 따다다다

 

 혼비백산, 여기저기 아우성치며 피어나는 붉디붉은 꽃, 꽃, 꽃들! 보인다

 

 방송국 앞 군중 틈에 빼곡히 고여 있던 시꺼먼 먹구름, 얼룩무늬 트럭에 가득 실려 간 비명들은 끝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아, 이를 어쩌나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너는 안 오고 친구여,

 네 땅 거기에도 지금쯤 핏빛 아카시아꽃 피었느냐

 

 

- 시집 『각시붓꽃』 (2020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