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詩 /각시붓꽃
절벽을 읽는 방식
여만
2021. 3. 5. 10:48
절벽을 읽는 방식
아는가, 희망이란 말은 순전히 절벽에서 탄생했다
소리 없이 울며 울며
절벽 끝에서 눈 감고 맨발로 서 있는
그때 절망이 뒤돌아서기를,
혼자서 오금을 떨며 힐끗힐끗 곁눈질로 지켜보는 절벽을 상상해 보았는가
나는 절벽이 신의 선물이라 믿는다
그 벼랑 언저리에서 몇 번이나 내질렀던 그 탄성, 그렇다
언젠가 가까스로 오른 적 있는 그날의 절벽을 잊을 수 없다
전설 속 절벽에 오른 사람들은
신성한 제물을 바치듯 간절한 절망을 꺼내 절벽에 바쳤다
절벽에는
번쩍, 하고 등 뒤에서 섬뜩하게 내리치던 그 비명 스미었다
두 손 바짝 힘주고
등 돌려 아래로 더 아래로
한 가닥 빛줄기가 간절한 절벽이 가끔씩 뜨겁게 번져가는 궤적을 되밟아
느릿느릿 내려다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절망은 절벽보다 깊다
절망이 깊을수록 절벽은 자기보다 깊이 뛰어내린다
- 시집 『각시붓꽃』 (2020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