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詩 /각시붓꽃
분홍, 속수무책으로 번지는
여만
2021. 3. 5. 10:47
분홍, 속수무책으로 번지는
분홍을 기다린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분홍은 이따금 동쪽이거나 서쪽에서 목격된다
분홍은 끝없이 분홍이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 막 깨어난 새벽녘에도 숨죽여 바라보는 해 질 녘에도 분홍은 나타난다 슬그머니 나타나서
마침내 내 눈가를 적시고 흘러넘친다
어떤 분홍은 나의 왼손과 오른손에서 태어난다 당신 젖가슴같이 내 손 부피에 딱 맞아서
생각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속수무책으로 번진다
어쩌다 기다리다 잠든 날 분홍은
내 꿈속 소맷자락에도 입술에도 비밀리에 묻어 있다 이때, 분홍은 새콤달콤한 사과의 표정에 가깝다 알파벳 y자를 닮은 멋진 자세의 사과나무와도 겹쳐
진다
풍경이 헐거워진 입동 무렵 사과나무 가슴팍의 잠금장치를 풀면 오래전 내가 찾던
잘 익은 분홍이 공중에 조마조마하게 매달려 있다
아무도 모르게
냉큼 베어 먹고 싶은, 분홍
- 시집 『각시붓꽃』 (2020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