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새의 훗날 -박지웅
여만
2018. 5. 1. 07:30
새의 훗날
박지웅
나무가 아름답고 긴 내장을 꺼낸다
제가 뱀인지 모르는 뱀이 제가 나무인지 모르는 나무줄기를 기어오른다
몸통으로 숨통을 죈다, 뱀은 긴 구멍이다
제가 새인지 모르는 어린 새는 길고 어두운 실개천을 따라 걷다 부리에서 흰 꽃을 피울 것이다
바깥에만 삶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제가 새인지 모르는 꽃들이 뱀의 피부에 수놓인 봄날
갈라진 혀끝에서
다시 갈라진 혀를 내미는 나무를 뱀의 어느 날이라 할까
새는 뱀을 통과해 꽃이 되고
뱀은 꽃의 힘으로 기어가 나무로 선다
흙속으로 내장을 밀어 넣어
꼼꼼하게 물을 길어 올린 나무는 훗날 어린 새를 키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먹이를 던지는 손이다
봄이 오면 뱀은 등에 꽃을 피우고
길고 부드러운 수천 년의 내장을 흘러 다닐 것이다
⸻계간 《시와 정신》 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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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1969년 부산 출생. 2004년 《시와 사상》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너의 반은 꽃이다』『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