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잿빛 두루미가 섰던 자리 - 조숙향
여만
2016. 7. 8. 13:46
잿빛 두루미가 섰던 자리
조숙향
1
발목 감아 도는 물살을 딛고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섰던 잿빛 두루미 한 마리
가끔 그 자리에서 물살을 휘저으며
물고기를 잡아먹기도 하다가, 후두둑
강물을 감싸듯 차오르던 날갯짓을 본 적이 있는데
두루미가 섰던 그 자리
거센 황톳물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는 한 마리 두루미가 되어
강물을 오래오래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2
마흔일곱 해 물살이 빠르게 흘러가버린 강가에서
두루미의 긴 목을 빼고서야 나는
마흔일곱 해를 다 채우지 못하고 먼 길 떠난 아버지를 본다
그해 나는, 황톳물보다 붉은 가난에 밀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떠다녔는데
긴 목을 빼고 아버지는 창가에 서서
기별 없는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기만 했었는데
강물의 흐름을 찬찬히 읽게 된 이즘에야 그 모습이
어른어른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살았던 시간보다 나를 더 오래 살게 하는 강물이
점점 미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집『도둑고양이 되기』(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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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향 / 1960년 강원도 강릉 출생. 2003년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도둑고양이 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