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생각하는 사람 -김행숙

여만 2015. 9. 23. 21:29

생각하는 사람

   김행숙


나는 유리창을 닦다 말고 딴 생각에 빠졌다, 나오며......반은 맑고 반은 흐린
풍경을 보았다. 물이 얼다 말면 어떻게 될까, 그쯤은 나도 안다, 풍경은 같은 풍
경 같겠지만 같은 풍경이 아니다.

얼음이 녹다 말면 어떻게 될까, 나는 늘 생각하다 말지.
불이 붙다 말았으면 내 사랑은 얼마 동안만 따뜻할까. 안 탄 곳은 하나도 뜨겁
지 않을까. 타지 않은 곳이면 내내 멀쩡할까.

500원짜리 동전을 주우려고 허리를 구부리다 말고 또 생각에 빠졌다, 나오
며......동전 중에서 제일 큰 동전, 그쯤은 나도 안다. 100원짜리 동전이 세상에
나온 첫해에 나는 태어났다. 1원짜리 동전이 시장에서 사망한 그 해, 내가 훔친
동전들로 상점에서 무엇을 살 수 있었나, 무엇은 절대 살 수 없었나, 내가 흘린
동전을 잠시 쥐었던 주인의 손들은 몇 개, 몇 백 개, 몇 천 개 둥근 고리로 이어지
며 어딘가에서, 작은 주먹을 쥔 아기들이 울면서 태어나듯 아직도, 불어나고 있
을까. 다들 잘 살고 있나요?
나는 왜 동전 생각만 하는 걸까, 내 사랑이 꺼지다, 마지막 숨소리처럼 불이 붙
으려고 하는데.......

흐린 뒤 맑음"이라고 했는데......나는 유리창처럼 서서 날씨는 계속해서 변
한다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우리는 일기예보를 궁금해 하지만 그렇군, 누구의
말도 다 믿지는 않는다고 중얼거렸다.
그쯤은 나도 안다, 알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을 나는 또 생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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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1970년 서울 출생.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등. 문학에세이 『에로스와 아우라』. 강남대 국문과 교수. 노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