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사과에 도착한 후 -심언주

여만 2015. 6. 23. 14:30

사과에 도착한 후

 

     심언주

 

 

 

내가 오른쪽 볼과 왼쪽 볼을 내어 주지 않으면

사과는 부풀지 않는다.

흥분이 극에 달해야만

너는 향기로워진다.

이제껏 구분되지 않던 냄새를 드러내며 비로소

둥글어진다.

 

너는 노을이 아름답다지만

누가 칼날을 세우기라도 하면 핏줄들이 모두 숨어 버린다.

모처럼의 흥분이 사그라질까 봐 나는

칼끝에 집중한다.

 

사과는 사과를 유지하려 애쓴다.

둥근 사과는 이미 잘린 사과일지 모른다.

사과 노릇을 하려는 사과일지 모른다.

 

창 너머로 나란히 기차가 가고

덜컹덜컹 배경을 자르면서 가고

칼이 지나가면서 고요해지는 저녁이다.

나는 환부를 움켜쥐고 몸을 뒤튼다.

칼이 지나간 줄도 모르면서

너는 노을이 아름답다 한다.

 

     —시집『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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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언주 / 1962년 충남 아산 출생. 200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4월아, 미안하다』『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