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서정소곡(抒情小曲)/이시하

여만 2015. 6. 10. 10:00

서정소곡(抒情小曲)

 

     이시하


  시 같은 건 쓰지 말 걸 그랬네 시인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걸
그랬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당신과 당신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내가 만나 강원도 두메 어디쯤에 흙집이나 지어
설렁설렁 살걸 그랬네 시간이 멈춘 그곳에는 아무 때나
밤꽃 향기 짙어오겠네 아무 때나 밥물냄새 넘쳐나겠네
아무 때나 갓난애 울음소리 들려오겠네

  순한 아이들이 하나둘 감자알처럼 옹골지게 매달리면
허허허허, 당신과 나는 웃어대겠네, 까치며 멧새며 까투리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고, 달빛 서리서리 고운 밤이면
참나무나 너도 밤나무가 당신과 나의 서툰 사랑가를 엿들으며
킬킬대겠네 가끔 소나기 시원하게 퍼붓는 날이면 호박전도
부치고 옥수수도 삶으며 툇마루에 앉아 내리는 비나 시름없이
바라보겠네 아이들이 일찍 잠든 밤이면 어쩌면, 어쩌면 또
밤꽃 향기 하르르르 물오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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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李翅河) / 1967년 경기도 연천 출생. 본명은 이향미. 2006년 제12회 지용 신인문학상 당선. 2008년 제10회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푸른 생으로의 집착』(2005),『나쁜 시집』(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