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침묵 -김명인
여만
2015. 1. 10. 07:00
침묵
김명인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 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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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1946년 경북 울진군 출생. 1973년 〈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東豆川』『머나먼 곳 스와니』『물 건너는 사람』『푸른 강아지와 놀다』『바닷가의 장례』『길의 침묵』『바다의 아코디언』『파문』『꽃차례』『여행자 나무』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