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성당 부근 -정세기
여만
2015. 1. 3. 07:00
성당 부근
정세기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계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성당 가까이에 살던 그해 겨울
지붕들이 낮게 엎드려
소리 없이 젖어 잠들고
그런 밤에 내려온 별들은
읽다 만 성경 구절을
성에 낀 창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눈사람이 지키는 골목길을 질러
상한 바람이 잉잉 울고 간 슬픔을
연줄 걸린 전깃줄이 함께 울고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
종소리가 은은한 향기로 울려퍼지면
저녁 미사를 보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긴 그림자도 젖어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장작더미 위로
쌓이던 달빛이 스러지고 사랑하라
사랑하라며 창가에 흔들리던 촛불도 꺼진 밤
그레고리안 성가의 낮은 음계를 밟고
양떼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성당 뜨락엔 마리아상 홀로 남아
산수유 열매 같은 알전구 불빛을 따 담고 있었다
- 『겨울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 실천문학사 2002
1996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당선작